1920년에 최수봉은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박재혁도 같은해에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1년뒤인 1921년에는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김익상이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던졌으며 1923년에는 경성에서 김상옥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후 일본 경찰과 서울에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김상옥은 1922년 10월 무기와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에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였다가 사이토 총독이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들에게 체포된 후 일본 군경 400여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하였다.
의열단의 의거 활동은 해외에서도 이루어졌는데 1924년에 김지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왕궁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감행했다. 1922년 중국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한 김지섭은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고 이후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가 일어나 한국인 학살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일본으로 갔다. 1924년 초 일본 동경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의 기회로 삼으며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경으로 가던 중,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일본 궁성에 투탄하기로 결정하였다.
1월에 황성 정문에 접근하여 호위경관이 저지하자 폭탄 한 개를 던지고 재빨리 궁성 쪽으로 달려갔는데 호위경관들이 달려오자 나머지 폭탄을 던지고 붙잡혔다. 1925년 8월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28년에 옥사를 하였다.